기획서 양식을 찾고 있다면, 잠깐 멈춰주세요

누구든 사업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꽤 오래 품어온 거라 확신까지 이른 사고 단계예요. 이제 검색을 해서 내 아이디어를 실현시켜줄 구체적인 행동을 하게 돼 있습니다.

"앱 기획서 양식." "앱 기획서 템플릿." "서비스 기획서 작성법."

검색 결과가 마구 쏟아질 거예요. PPT 양식, 노션 템플릿, 스토리보드 샘플. 그래서 하나를 열고, 나름 그 내용대로 충실히 작성하기 시작합니다. 서비스 개요란에 한 줄 적고, 타겟 유저란에 "20~30대 직장인"이라고 적고.

그러다 시장 분석, 경쟁사 분석 같은 전문 용어가 나오면 그 자리에서 손이 멈추고 맙니다.

"이걸 내가 어떻게 하지?"

멈추는 게 당연합니다. 앱을 만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기획서 양식을 보면, 채워야 할 칸은 많고 채울 수 있는 칸은 거의 없거든요. 한 시간이 지났는데 노션 페이지는 빈칸 그대로예요. 그때부터 의욕이 꺾이기 시작합니다.

양식이 문제가 아닙니다. 양식은 넘쳐나요. 문제는 아이디어를 문서의 언어로 옮기는 방법을 아무도 안 알려준다는 거예요.

이 글은 양식을 하나 더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아이디어 단계에서 기획서로 넘어갈 때, 뭘 적어야 하고 뭘 안 적어도 되는지를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개발사가 진짜 보는 건 기획서의 두께가 아닙니다

먼저 오해 하나를 풀겠습니다.

기획서가 두꺼울수록 좋은 기획서라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50페이지짜리 PPT에 화면 설계까지 꼼꼼하게 그려서 가져가야 개발사가 제대로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14년 동안 530건 넘는 프로젝트를 받아본 입장에서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꺼운 기획서가 오히려 더 난감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50페이지 안에 기능이 서른 개가 들어있는데, 정작 "이 서비스가 누구의 어떤 문제를 푸는 건지"가 빠져 있었거든요. 화면은 예쁘게 그려져 있는데 사용자가 이 화면에서 저 화면으로 왜 넘어가는지 논리가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개발은 시작할 수 있어요. 근데 중간에 반드시 흔들립니다. "이게 원래 의도한 건가요?"라는 질문이 양쪽에서 끝없이 돌아오거든요. 그때부터 일정이 밀리고, 추가 비용이 생기고, 서로 지쳐갑니다.

개발사가 진짜 필요로 하는 건 두꺼운 문서가 아니라,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입니다.

기획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세 가지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1이 서비스가 왜 존재해야 하는가

"가계부 앱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건 답이 아닙니다. 가계부 앱은 이미 수백 개가 있거든요. 개발사가 이 한 줄을 받으면 "그래서 기존 앱이랑 뭐가 다른 건가요?"를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바뀌어야 합니다. "매달 카드값이 얼마나 나올지 몰라서 불안한 사람이 있습니다. 기존 가계부 앱은 지출을 기록한 뒤에 보여주는 구조라서, 다음 달 예상 지출을 미리 알려주는 기능이 없습니다. 이 간극을 채우는 서비스를 만들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대단한 시장 분석 자료가 필요한 게 아닙니다. 누가 불편한지,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내 서비스가 뭘 다르게 해주는지. 이 세 줄이 들어 있으면 개발사는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2사용자가 앱 안에서 뭘 하는가

와이어프레임을 그리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용자의 행동을 순서대로 적어보라는 이야기예요.

"앱을 열면 이번 달 예상 지출 금액이 보인다. 금액을 누르면 카테고리별 상세가 나온다. 카테고리를 누르면 해당 항목들이 리스트로 보인다. 항목을 길게 누르면 삭제하거나 수정할 수 있다."

이게 유저 플로우입니다. 도구가 필요 없어요. 노트에 글로 적어도 되고 노션에 번호를 매겨도 됩니다. 중요한 건 형식이 아니라, 사용자가 앱을 열고 나서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의 경로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 있는가예요.

여기서 많은 분이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경로를 적다가 "이 기능도 있으면 좋겠는데"가 끼어드는 거예요. 그러면 경로가 갈라지고, 갈라진 경로마다 또 기능이 붙고, 순식간에 기능이 스무 개가 돼 있습니다. 처음에는 핵심 경로 딱 하나만 적어보세요. 그 하나가 말이 되면 나머지는 나중에 붙이면 됩니다.

3첫 버전에 꼭 들어가야 하는 기능은 뭔가

아이디어를 기획서로 옮기다 보면 기능이 계속 늘어납니다. 이것도 넣어야 할 것 같고 저것도 빠지면 아쉬울 것 같고. 기능 목록이 길어질수록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서비스겠는데?"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해요.

근데 이 목록을 개발사에 가져가면 견적이 몇천만 원으로 나옵니다. 놀라서 "좀 줄여야 하나" 싶어지는데, 어떤 걸 빼야 할지 기준이 없으니까 결정을 못 합니다.

기준은 하나예요. "이 기능이 없으면 서비스 자체가 돌아가지 않는가?" 이 질문에 "예"인 것만 첫 버전에 넣으면 됩니다.

가계부 앱이라면 지출 입력과 예상 금액 표시가 없으면 서비스가 안 돌아가니까 들어가야 합니다. 근데 소셜 공유 기능이나 월별 리포트 PDF 내보내기는 없어도 서비스가 돌아가거든요. 그건 사람들이 실제로 쓰기 시작하고 나서 넣어도 전혀 늦지 않습니다.

기능마다 "필수 / 다음 버전 / 나중에"로 세 칸을 나눠보세요. 필수에 다섯 개가 넘어가면 다시 한번 깎아내야 합니다. 다섯 개를 넘기면 그건 MVP가 아니라 완성형 제품을 만들려는 거예요.

이 세 가지면 개발사와 대화가 시작됩니다

앱 기획서에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서비스 존재 이유와 핵심 사용자 경로와 첫 버전 기능 목록 세 가지

서비스의 존재 이유, 사용자의 핵심 행동 경로, 첫 버전 기능 목록. 이 세 가지가 정리되어 있으면 개발사와 첫 미팅을 잡을 수 있습니다.

와이어프레임이 없어도 괜찮아요. 시장 분석 PPT가 없어도 됩니다. 노션에 세 페이지를 적든 종이에 손글씨로 쓰든 형식은 상관없어요. 내용이 담겨 있으면 됩니다.

오히려 이 세 가지가 빠진 채 두꺼운 기획서를 가져오면, 개발사는 처음부터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 앱이 누구한테 필요한 건가요?" 미팅 자리에서 이 질문을 받으면 당황스럽거든요.

반대로 세 가지가 정리되어 있으면 대화의 출발점이 달라집니다. "이 부분은 이렇게 만들면 되겠네요"라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바로 시작돼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

여기까지 읽고도 불안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만 적어서 가져가면 너무 허술해 보이지 않을까?"

이해합니다. 근데 한 발 물러서 생각해보면, 기획서가 완벽하려면 서비스를 이미 다 알고 있어야 해요. 아직 만들어보지도 않은 서비스를 완벽하게 안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완벽한 기획서를 만들려다가 몇 달을 보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몇 달 동안 시장은 바뀌고, 비슷한 서비스는 나오고, 처음의 열정은 서서히 식어갑니다. 그리고 어느 날 노션을 닫으면서 "나중에 다시 해야지" 하게 돼요. 그 나중은 잘 안 옵니다.

80점짜리 기획서를 가지고 빠르게 대화를 시작하는 게, 100점을 향해 혼자 몇 달을 쓰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좋은 개발사라면 80점짜리를 가져와도 대화를 통해 같이 100점으로 올려줍니다. 빈칸을 채우는 것도 파트너의 역할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