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계에서 10년 넘게 일했습니다. 현장의 문제가 뭔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다고 자신해요. 그래서 이걸 직접 서비스로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이르렀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도 비슷할 거예요. 내 영역에서 겪어온 문제가 선명하고, 이걸 풀어주면 사람들이 쓰겠다는 감각까지 갖고 계실 겁니다. 여기까지는 자연스럽습니다. 아이디어가 있다는 게 이미 그 뜻을 품고 있으니까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게 있습니다. 사업계획서를 써보자는 거예요. 머릿속에 있는 걸 문서로 정리만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누구나 한번 이런 경로를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쓰려고 하면 막힙니다. 어떤 항목을 어떤 순서로 채워야 하는지, 감이 안 잡히거든요. 그러면 폭풍 검색을 하게 됩니다. 사업 개요, 시장 분석, 경쟁사 분석, 고객 분석, 수익 모델, 마케팅 전략, 재무 계획… 항목만 아홉 개가 쏟아져요.
처음 두세 칸은 채워집니다. 내가 아는 영역이니까요. 그런데 시장 규모를 써야 하는 칸에서 손이 멈춥니다. TAM이라는 단어는 들어봤는데, 숫자를 어디서 가져와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혀요. 경쟁사 분석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한 서비스가 있긴 한데, 뭘 기준으로 비교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며칠이 지나면 그 문서는 열기가 싫어집니다. 아이디어는 여전히 좋다고 느끼는데, 사업계획서라는 형식이 발목을 잡은 겁니다.
사업계획서가 먼저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업계획서는 생각을 정리한 결과물이지, 정리하는 도구가 아니에요.
저도 처음에는 양식부터 채우면 정리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빈칸을 마주하면, 그 빈칸 하나하나가 압박이 되더라고요. 채워야 하니까 억지로 쓰게 되고, 억지로 쓴 문장은 본인도 확신이 안 섭니다. 그 상태로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돌아오는 말은 하나예요.
"그래서 핵심이 뭔데?"
순서가 바뀐 겁니다. 양식을 채우기 전에, 먼저 정리해야 할 게 있어요. 딱 세 가지입니다.
이 사업은 누구의 문제를 푸는 건가요
"시장이 크다"는 말보다 "이 사람이 이 상황에서 이만큼 불편하다"가 훨씬 강력합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물류 업계 종사자를 위한 관리 솔루션."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문장만으로는 뭘 만들어야 할지 아무도 판단할 수 없어요.
반면에 이렇게 쓰면 어떨까요.
"매일 아침 엑셀로 배차표를 짜는 중소 물류업체 운영팀장이, 하루에 2시간을 여기에 쓰고 있다."
이러면 문제의 크기가 바로 보입니다. 누가 불편한지, 얼마나 불편한지, 언제 불편한지까지 담겨 있거든요. 이게 사업의 출발점이에요.
도메인 지식이 있는 분이라면 이 문장을 쓸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봐왔으니까요. 그러니까 사업계획서의 시장 분석보다, 이 한 문장을 먼저 만드는 게 순서입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요
문제가 있으면 사람은 어떻게든 버팁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요.
배차표 문제라면 엑셀을 쓰거나, 카카오톡으로 기사에게 일일이 연락하거나, 아니면 경험 많은 직원 한 명한테 전부 맡기고 있을 겁니다. 이게 지금의 대안이에요.
여기서 봐야 할 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현재 대안의 한계가 무엇인지. 다른 하나는 그 한계를 왜 감수하고 있는지예요. 이 두 번째가 중요합니다.
"불편하긴 한데 바꿀 만큼은 아니야"
이렇게 느끼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도 안 팔리거든요. 반대로 "이거 때문에 매달 사고가 나요"라는 수준이면, 돈을 내고라도 바꿀 겁니다. 그 간극이 바로 사업 기회입니다.
그리고 사실 경쟁사 분석이라는 것도 이 질문의 연장선이에요. 기존 솔루션이 있는데 이 사람이 왜 안 쓰는지, 없다면 왜 아직 아무도 안 만들었는지. 현장을 아는 분이 이 답을 가장 정확하게 갖고 있습니다.
돈은 누가, 왜 내나요
수익 모델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단순해요. 이 서비스에 돈을 낼 사람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출발하는 겁니다.
다만 주의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문제를 겪는 사람과 돈을 내는 사람이 다를 수 있어요. 배차표를 짜는 건 운영팀장인데, 결제 승인을 하는 건 대표거든요. 운영팀장은 시간이 아깝고, 대표는 인건비가 아깝습니다. 같은 서비스인데 설득해야 하는 포인트가 다른 거예요.
이걸 정리하면 가격의 기준이 생깁니다. 월 10만 원이면 팀장 한 명이 하루에 2시간을 아낀다. 대표 입장에서 보면 직원 월급 대비 명확한 이득이 보이거든요. 재무 계획이라는 건, 결국 이 계산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정리되면, 사업계획서의 품질은 당연히 올라갑니다
누구의 문제인지, 지금 어떻게 해결하는지, 돈은 누가 왜 내는지. 이 세 줄이 선명해지면 시장 분석도, 경쟁사 분석도, 수익 모델도 빈칸이 아니라 이미 아는 이야기를 옮겨 적는 일이 됩니다.
반대로 이 세 가지가 흐릿한 상태에서 양식을 채우면, 문장은 늘어나는데 확신은 줄어들어요. 투자자든 심사위원이든, 그 흐릿함은 금방 느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