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창업패키지, TIPS, 시드 투자, 시리즈A를 검색하면 각각의 설명은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어떤 순서로 이어지는지, 앞에서 뭘 해야 뒤가 열리는지는 잘 안 나옵니다.

오늘 그 경로를 한 팀의 실제 여정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예창패에 세 번 떨어지고도 누적 16억 원까지 간 팀입니다. 이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다음에 내가 뭘 해야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레드윗 자금 여정 타임라인 — 예창패 탈락x3→랩스타트업→본엔젤스 시드→TIPS→프리시리즈A→누적 16억

먼저 이 팀이 뭘 하는 회사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연구노트를 아십니까. 대학원이나 연구소에서 실험할 때마다 기록하는 노트입니다. 연구의 성공도, 실패도 전부 담겨 있는데, 졸업하거나 과제가 끝나면 아무도 다시 보지 않습니다. 수십 년치 연구 기록이 창고에 묻히거나 버려집니다.

레드윗은 이 문제를 풀려고 만든 회사입니다. 블록체인으로 위변조가 불가능한 전자연구노트를 만들어서, 연구 기록이 사라지지 않게 하겠다는 거였습니다.

아이디어는 있었지만 돈이 없었습니다. 예비창업패키지에 지원했습니다. 떨어졌습니다. 다시 지원했습니다. 또 떨어졌습니다. 세 번째에도 떨어졌습니다.

대부분의 창업자라면 여기서 다른 길을 찾았을 겁니다.

레드윗이 네 번째에 다시 도전할 수 있었던 건, 그 전에 쌓아둔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떨어지기 전에 쌓아둔 것들

2019년 상반기, 김지원 대표는 카이스트 'E*5 랩스타트업' 프로그램에서 최우수팀으로 뽑혔습니다. 상금 2,000만 원이 나왔고, 그 돈이 법인 설립 자본금이 됐습니다.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중에 본 현장의 문제가, 이제 회사의 문제가 된 겁니다.

같이 만들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2019년 초 CES를 보고 온 뒤 LA 투어에서 친구 2명에게 창업을 제안했고, 석사 동기생 3명이 합류했습니다. 개발자 2명과 사업·투자 담당 1명, 김지원 대표까지 네 명의 공동창업자 구성이 이때 완성됐습니다.

아이디어를 혼자 품고 있지 않고, 가장 가까운 네트워크에서 먼저 제안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 팀 구성 방식이 이후 모든 투자 심사에서 강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팀이 갖춰지면서 첫 번째 도전이 가능해졌습니다. 예비창업패키지에 지원했습니다.

세 번 떨어지다

지원 결과 불합격 3장과 네 번째 빈 지원서

그런데 떨어졌습니다.

다시 도전했습니다. 또 떨어졌습니다.

세 번째에도 떨어졌습니다.

여기서 대부분은 멈춥니다. "이 사업은 안 맞는 거 아닌가", "다른 지원사업을 찾아봐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레드윗은 매번 떨어질 때마다 한 가지를 했습니다. 떨어진 이유를 분석하고 사업계획서를 다시 썼습니다. 세 번 떨어지는 동안 문제 정의가 점점 날카로워졌습니다. "연구노트가 버려진다"에서 "연구 데이터의 국가적 손실"로, 그리고 "블록체인 기반 전자연구노트가 이 문제를 해결한다"로 정리되어 갔습니다.

네 번째 사업계획서는 처음과 완전히 다른 문서였을 겁니다. 합격했습니다.

한국 창업 지원사업의 암묵적인 규칙이 여기에 있습니다. 심사위원은 아이디어의 참신함을 보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이 문제를 얼마나 정확히 정의했는가"를 봅니다.

세 번 떨어진 경험이 오히려 그 정의를 갈아준 겁니다.

거절은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다음 도전을 다듬어주는 정보가 되어준 겁니다. 그리고 그 정보가 쌓인 끝에, 다음 문이 열렸습니다.

다음 문이 열리다

열린 문 앞에 선 사람, 발자국, 빛

2019년 8월, 본엔젤스벤처파트너스가 레드윗에 시드 투자를 집행했습니다. 본엔젤스는 한국 최초의 초기 단계 전문 벤처캐피탈로, 배달의민족, 틱톡, 번개장터를 초기에 발굴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AC를 건너뛰다 — 같은 시드, 다른 경로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많은 초기 창업자가 AC(액셀러레이터)의 배치 프로그램을 먼저 거칩니다. 프라이머, 블루포인트, 오렌지플래닛, 스파크랩 같은 곳에서 3~6개월간 멘토링을 받고 시드 1억 정도의 투자를 받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레드윗은 AC를 건너뛰었습니다. 본엔젤스라는 초기 전문 VC에서 바로 시드 투자를 받았습니다. 이건 같은 시드 투자처럼 보이지만, 법적으로 완전히 다른 경로입니다.

구분AC (액셀러레이터)초기 전문 VC
법적 지위중기부 등록 '창업기획자'중기부 등록 '창업투자회사'
자본금1억 이상20억 이상
핵심 가치보육·멘토링·배치투자 + 후속 라운드 연결
투자 규모5천만~1억3~10억 이상
대표 예프라이머·블루포인트·오렌지플래닛·스파크랩본엔젤스·알토스·에이티넘·DSC

AC는 '창업기획자'로 등록된 곳이라 보육 의무가 있습니다. 배치 프로그램, 멘토 매칭, 데모데이를 운영합니다. VC는 '창업투자회사'입니다. 투자조합을 운용해서 돈을 넣습니다. 본엔젤스는 이 중에서 초기 단계에만 투자하는 VC입니다. 시드 규모로 투자하기 때문에 외형이 AC와 비슷해 보이지만, 법적 자격이 다릅니다.

레드윗이 AC 없이 직행할 수 있었던 건 세 가지가 이미 갖춰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 카이스트 석사 동기 4명으로 구성된 공동창업팀 (개발 2명 + 사업 2명)
  • 블록체인 + 연구노트라는 명확한 기술 차별성
  • 카이스트 E*5 프로그램 최우수팀으로 이미 검증

이 세 조건이 갖춰지면 AC 배치로 팀을 다듬을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제품 개발에 들어갑니다.

당신의 팀은 어느 경로인가

그러면 어떤 팀이 어느 경로를 택해야 할까요.

상황맞는 경로
아이디어는 있는데 팀이 아직 약하다AC 배치 — 프라이머·블루포인트·오렌지플래닛
첫 창업이고 네트워크가 없다AC 배치 — 멘토링이 생명입니다
TIPS 추천이 필요하다AC 배치 — 대부분 AC가 TIPS 운영사입니다
팀이 이미 강하고 기술 증명이 있다초기 VC 직행 — 본엔젤스 같은 초기 전문 VC
시간을 아껴 바로 제품 개발에 쓰고 싶다초기 VC 직행 — 배치 3~6개월을 건너뜁니다

레드윗은 후자였습니다. 그래서 AC 없이 바로 본엔젤스 시드로 갔습니다.

본엔젤스가 레드윗에 투자한 이유는 블록체인 기술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연구 데이터라는 구체적 시장 문제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술은 그 문제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했고, 진짜 힘은 문제 정의에서 나왔습니다. 예창패에서 세 번 다듬어진 그 문제 정의가 여기서 빛을 발한 겁니다.

초보 창업자가 이 선택에서 기억할 건 하나입니다. AC냐 VC 직행이냐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팀의 현재 상태가 결정합니다. 공동창업자 구성이 탄탄한가, 기술 차별성이 문서로 증명 가능한가, 이미 수상·프로그램 이력이 있는가. 셋 중 둘 이상이 '그렇다'면 초기 VC 직행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AC 배치가 훨씬 안전한 길입니다.

그리고 이 선택이 또 다음 단계를 열어줬습니다.

TIPS — 추천이 열어주는 문

TIPS 프로그램 구조 — VC/AC 추천으로 정부 R&D 자금 5~10억원 지원

시드 투자 이후, 레드윗은 TIPS에도 선정됐습니다.

TIPS는 AC나 VC가 추천한 팀에 중소벤처기업부가 R&D 자금 5~10억 원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추천 없이는 지원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시드 단계에서 어떤 투자사와 손을 잡느냐가 이 경로를 열어주기도 하고 닫기도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배움이 하나 있습니다. 시드 투자를 받을 때 단순히 "돈을 주는 곳"을 고르는 게 아닙니다. 그 투자사가 다음 단계 자금까지 연결해줄 수 있는 곳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선택 한 번이 다음 단계 자금을 당기거나 멀리합니다.

TIPS 선정 이후 레드윗은 프리 시리즈A를 유치했고, 이 시점에 구독형 전자연구노트 서비스 '구노(Goono)'를 출시하면서 드디어 제품이 시장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숫자가 따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숫자가 따라오기 시작하다

레드윗 핵심 지표 — 누적 투자 16억, 갱신률 70%, 대형 구축 5건, 2025 매출 20억 전망

누적 투자유치액은 약 16억 원에 달하고, 구노의 갱신률은 70%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5개 기관의 대형 구축 사업도 수주했습니다. 2025년 기준 매출 20억 원 전망과 함께 손익분기점 전환이 예상되며, 포스트팁스와 딥테크 팁스 후속 지원 사업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지원 대표는 2021년 포브스 아시아 30세 이하 리더에 올랐습니다.

세 번 떨어진 사람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여정을 돌아보면, 세 가지가 남습니다.

이 여정이 남긴 세 가지

종이 위 손글씨 — 떨어져도 멈추지 않는다, 기술보다 문제 정의가 먼저, 첫 투자사 선택이 다음 길을 결정

첫째, 떨어져도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창패에 세 번 떨어진 뒤 받는 팀이 실제로 있습니다. 거절은 끝이 아니라, 다음 지원서를 다듬어주는 정보가 됩니다.

둘째, 기술보다 문제 정의가 먼저라는 겁니다. "연구노트가 국가적 손실"이라는 한 문장이 예창패 심사에서 통했고, 본엔젤스 투자 심사에서 통했고, TIPS 심사에서도 통했습니다. 기술은 그 문제를 푸는 수단으로 기능한 겁니다.

셋째, 첫 투자사 선택이 다음 길을 결정한다는 겁니다. 시드 투자자를 고를 때 "돈을 주는 곳"이 아니라 "다음 단계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곳"을 봐야 합니다.

각 단계마다 심사 기준이 달랐습니다. 예창패는 문제 정의를 봤고, 본엔젤스는 시장의 구체성을 봤고, TIPS는 기술의 차별성을 봤습니다. 매번 다른 증명이 필요했습니다.

블록체인 기반 전자연구노트라는 기술이 이 모든 단계를 지탱하는 중심축이었습니다. 기술 파트너가 각 단계의 증명을 같이 쌓아주면, 한 번 만든 자산이 다음 단계로 이어집니다. 매번 처음부터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레드윗처럼 수년에 걸쳐 정석 경로를 밟는 IT 창업자에게, 기술 파트너가 옆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로를 매일 추적합니다. 다음 레드윗이 예창패에 처음 도전하는 순간부터, 그 팀 옆에 있기 위해서입니다.

이 글은 흐름소프트가 매일 관찰·정리하는 창업 생태계 시리즈 '자금 여정' 편입니다.
모든 수치는 공개 보도자료·THE VC·포브스 등 공개 출처를 종합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