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약서 마지막 장에는 표 하나가 있습니다.
사업비를 네 줄로 나눈 표입니다.
도장 찍는 날에는 한 번 보고 넘기지만,
그 네 줄이 다음 8개월 동안 매달의 판단을 결정합니다.
어느 칸에 어떻게 쓸지를 모르면 정산 직전에 무너지고,
안다고 해도 옆에서 같이 봐줄 사람이 없으면 새벽에 사유서 앞에서 멈춥니다.
이번 편은 한 대표의 이야기로,
그 표가 8개월 동안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여드립니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통장을 닫고, 협약서를 다시 펼쳤습니다.
마지막 장에 표 하나가 붙어 있었습니다. 사업비가 네 줄로 나뉘어 적혀 있었는데, 도장 찍던 날에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축하한다는 말만 오갔지, 이 네 줄이 앞으로 8개월간 쓰는 모든 돈의 방향을 정해줄 거라고는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옆에 있던 대표 한 분이 물었습니다. "비목이 뭐예요?" 저도 몰랐습니다. 웃기만 하고 헤어졌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협약서를 가방에 넣으면서, 마지막 장이 접혀 들어가는 걸 봤습니다. 그 접힌 페이지가 그 표였습니다.
그날 저녁, 개발을 맡아준 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협약서 봤는데, 비목 정리 같이 하시죠."
솔직히 그때는 그 한마디가 8개월을 바꿀 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칸이 안 맞으면 증빙이 안 됩니다
6월에 첫 지출이 생겼습니다.
서버를 세팅하는데 비용이 나갔고, 영수증을 들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재료비에 넣어야 하는지 외주용역비에 넣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협약기관에 전화했더니 "계획서 기준으로 넣으세요"라는 말만 돌아왔습니다. 계획서를 다시 펼쳤는데 어느 칸에 배정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더군요.
그때 그 팀에서 한마디가 날아왔습니다.
"그건 외주용역비에 넣으셔야 합니다.
계획서 12쪽에 적혀 있어요."
계획서 12쪽에 적혀 있어요."
저는 12쪽을 편 적도 없었습니다.
물을 데가 있다는 것
7월에는 디자인 수정비를 인건비에 넣었다가 반려당했습니다. 외주용역비였습니다. 칸 하나 틀렸을 뿐인데 증빙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뒤로는 지출이 생기면 먼저 물었습니다. 칸이 맞는지, 분기가 맞는지. 물을 데가 있다는 게 이렇게 다른 건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8월, 중간점검이 다가왔습니다. 영수증을 모아 정리하려는데 순서가 뒤죽박죽이었습니다. 날짜별로 다시 나누고, 비목별로 다시 묶고, 반쯤 했을 때 그 팀에서 정리된 자료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제가 반나절 걸려 한 작업이 이미 끝나 있더군요. 양식에 옮겨 적기만 했고, 점검은 무사히 넘겼습니다.
8월은 그렇게 넘겼습니다. 9월에 일정이 한 번 흔들렸지만, 그땐 곧 따라잡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새벽 두 시, 커서만 깜빡였습니다
그런데 10월에 무너졌습니다.
기능 하나가 두 달 밀렸습니다. 9월에 끝나기로 한 작업이 11월로 넘어가면서, 3분기에 쓰기로 했던 외주용역비가 통째로 4분기에 몰렸습니다. 항목 변경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요청서에 사유와 근거를 적어야 했습니다.
언제 밀렸는지, 왜 밀렸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새벽 두 시에 카톡 대화방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지 날짜를 하나씩 대조하면서 일정을 역추적했는데, 화면이 흐려지더군요. 사유서 파일을 열었습니다.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는데, 한 글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메일이 와 있었습니다.
날짜별 변경 이력이 정리되어 있었고, 비목 이동 근거까지 한 장으로 붙어 있었습니다. 제가 새벽에 뒤지던 그 내용이 이미 문서가 되어 있었던 겁니다. 사유서에 옮겨 적었고, 변경 승인은 이틀 만에 나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혼자 진행한 다른 대표님은 같은 사유서를 한 달 동안 붙들고 있었다고. 기록이 없어서 처음부터 복구해야 했다고. 우리는 나흘이 걸렸습니다.
그날 퇴근길에 처음으로 그 팀에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돌아온 답은 짧았습니다.
"원래 같이 하는 거죠."
옆자리
12월, 완료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제출 버튼을 누르고 나서 협약서를 다시 꺼내봤습니다. 5월에 접혀 들어갔던 마지막 장을 펼쳤습니다. 그때는 숫자로밖에 안 보였던 네 줄에, 8개월치 이야기가 빼곡하더군요.
여기까지가 그 대표님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그 옆자리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개발을 맡았고, 비목을 같이 읽었고, 새벽에 사유서를 보냈던 쪽입니다. 그리고 "원래 같이 하는 거죠"라고 답했던 사람입니다.
개발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코드보다 비목이 먼저인 순간이 있더군요. 그래서 이 경험을 적어두기로 했습니다.
지금 협약서를 앞에 두고 계신 분이 있다면, 그 네 줄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옆자리를 한번 보십시오.
이 이야기에서 보이는 건 두 가지입니다.
첫째, 협약서 마지막 장에 적힌 네 줄은 도장 찍는 날이 아니라
8개월 동안 살아 있는 문서입니다.
둘째, 그 네 줄을 혼자 펴보면 8개월이 길지만,
옆에서 같이 펴주는 사람이 있으면 짧아집니다.
선정부터 운영까지 시리즈
1편 — 예비창업패키지, 선정이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2편 — 심사용 계획서를 실행용으로 바꾸는 법
3편 — 선정되면 끝인 줄 알았습니다
4편 — 개발 파트너, 세 가지로 가릅니다
5편 — 그 표, 네 줄 ← 지금 읽고 계신 글
1편 — 예비창업패키지, 선정이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2편 — 심사용 계획서를 실행용으로 바꾸는 법
3편 — 선정되면 끝인 줄 알았습니다
4편 — 개발 파트너, 세 가지로 가릅니다
5편 — 그 표, 네 줄 ← 지금 읽고 계신 글
비어 있다면, 8개월은 생각보다 깁니다.
선정부터 운영까지 시리즈, 여기까지입니다.
선정부터 운영까지 시리즈, 여기까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