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사업계획서를 쓰려고요.
그런데 첫 줄부터 막혔습니다.
"시장 규모: ____억 원."
빈칸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디어는 있었어요. 공공정보가 주민에게 안 닿는다는 것, 226개 지자체가 매일 정보를 쏟아내지만 정작 그걸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 그건 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낌을 숫자로 바꾸라고 하면,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거든요. 투자자가 보는 건 직감이 아니라 근거니까요.
그래서 AI에게 물었습니다. "공공정보 전달 시장 규모 알려줘."
돌아온 답은 전국 단위, 연간 수조 원이었습니다. 그럴싸해 보였지만, 그대로 쓸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풀려는 문제는 전국이 아니라 지역이었고, 수조 원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실제로 돈이 움직이는 접점이었으니까요.
이게 첫 번째 실패였습니다. AI는 속도를 줬지만, 질문이 잘못되면 그 속도가 오히려 엉뚱한 방향으로 데려갑니다.
혹시 지금 사업계획서 앞에서 비슷하게 막혀 계신다면, 이 경험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저도 거기서 시작했으니까요.
검색창에 답이 있었습니다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습니다. 시장 규모를 직접 묻는 대신,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검색하고 있는지부터 들여다봤습니다.
네이버 데이터랩과 구글 트렌드를 열었습니다. "보육수당 신청", "창업지원금 조건", "독거노인 복지" — 이런 키워드의 검색량이 꾸준히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정부지원금 나한테 해당되나"라는 검색어가 눈에 걸렸습니다. 지난 2년 사이 4.20배나 늘어 있었거든요.
이 숫자가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정보가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기에게 해당되는 건지 아닌지를 모르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걸요.
여기까지는 손이 풀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색량만으로 사업계획서를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검색한다는 건 불편하다는 뜻이지, 돈을 내겠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검색량 뒤에 있는 사람을 직접 봐야 했습니다.
당신의 사업이라면, 이 단계는 30분이면 됩니다. 네이버 데이터랩은 무료이고, 검색량 추이 하나만 봐도 아이디어가 진짜 필요에서 나온 건지, 내 착각인지 윤곽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숫자만으로는 부족해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커뮤니티에 들어갔습니다. 맘카페, 네이버 지식iN, 지역 오픈채팅방. 숫자 말고 맥락이 필요했습니다. 그 숫자 뒤에 어떤 사람이 어떤 표정으로 검색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한 분을 따라가봤습니다. 35세, 맞벌이 워킹맘이었습니다. 밤 9시에서 11시 사이, 아이 재우고 소파에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보육료 신청 방법"을 검색하고 계셨습니다. 정부24에 들어갔다가, 화면을 가득 채운 법률 용어 앞에서 멈춰버렸습니다. "이게 나한테 해당되는 건가?" 판단이 안 됐던 겁니다. 결국 앱을 닫았습니다.
이 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4명의 페르소나를 따라갔더니 같은 패턴이 반복되고 있었거든요. 정보를 발견해도 62%가 신청 단계에서 이탈하고 있었습니다. 복잡한 서류, 불분명한 자격 기준, 공문체로 가득한 안내문 — 이게 벽이었습니다.
그래서 AI를 한 번 더 꺼냈습니다. 커뮤니티 글 100개를 자동 분류해보려고요. 그런데 첫 결과가 이상했습니다. 99%가 "불만"으로 분류된 겁니다. 아무리 봐도 그럴 리가 없었습니다. 직접 하나씩 열어보니, AI가 부정적인 단어에 과잉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어렵다", "모르겠다"를 전부 불만으로 잡아버린 거였어요. 프롬프트를 "정보 탐색 의도가 있는 글"로 다시 설정하고, 50개를 직접 눈으로 교차 검증한 뒤에야 쓸 수 있는 분류가 나왔습니다.
두 번째 실패였습니다. AI가 내놓는 결과를 그대로 믿으면, 사업계획서가 아니라 오류 보고서가 만들어집니다.
당신의 사업이라면, AI가 분류한 결과 중 최소 20개는 직접 열어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귀찮지만, 그 20개가 나머지 전체를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치가 흐르다가 어디서 막히는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검색량, 커뮤니티 목소리, 페르소나 추적 — 따로 놓으면 각각의 파편이었습니다. 이걸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야 했습니다.
지자체가 정보를 만들고, 8개 채널에 올리고, 주민에게 닿고, 주민이 읽고 이해하고, 신청하고, 완료되는 것. 이 6단계를 한 줄로 그렸더니, 어디서 막히는지가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공식 채널로 도달하는 비율은 18%에 불과했습니다. 주민이 정보를 읽고 이해하는 비율은 35%였고, 놀랍게도 효과를 측정하고 있는 기관은 단 한 곳도 없었습니다. "보냈다"는 기록만 있고, "닿았는지"는 아무도 추적하지 않고 있었던 겁니다. 생산 과정의 42.5%가 대기와 낭비에 묶여 있었고, 226개 지자체가 매일 정보를 쏟아내지만 최종적으로 주민이 활용하는 건 23%뿐이었습니다.
이 데이터를 모아서 현황판으로 만들었습니다. 직접 보시면 느끼실 겁니다.


추정이 아닙니다. 실제로 경로를 따라가면서 추적한 데이터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갱신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사업이라면, 흩어진 데이터를 한 장의 흐름도로 연결해보시는 걸 권합니다. 그 순간이 오면 사업계획서의 절반이 한꺼번에 채워지는 경험을 하시게 됩니다. AI는 이 연결을 빠르게 도와주지만,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연결할지 정하는 건 그 사업을 가장 잘 아는 분의 몫입니다.
사업계획서가 채워지는 순간
현황판이 완성되자, 사업계획서의 빈칸들이 동시에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장 규모는 226개 지자체에 8종 정보 유형을 곱하고, 연간 생산량을 추적해서 산출할 수 있었습니다. 감으로 적은 게 아니라 실측에서 나온 숫자였습니다. 고객 문제는 명확해졌습니다. 72%가 공식 채널이 아니라 네이버에서 검색하고 있었고, 정보를 발견한 사람조차 62%가 신청까지 가지 못하고 이탈하고 있었습니다. 솔루션의 방향도 보였습니다. 정보를 더 많이 만드는 게 답이 아니라, 주민이 이미 있는 곳에서 정보를 만나게 하는 구조를 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실측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다른 누군가가 같은 시장에 뛰어들더라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경쟁 우위가 됐습니다.
처음에 깜빡이기만 하던 그 커서 앞의 빈칸, "시장 규모: ____억 원"이 근거가 붙은 숫자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AI는 속도를 줬고, 판단은 사람이 했습니다
이틀 걸렸습니다. AI 없이 했으면 아마 2주는 걸렸을 겁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AI가 해준 건 속도였지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전국 데이터를 보고 "이건 내 문제에 안 맞는다"고 좁힌 것도 사람이었고, 99%라는 이상한 숫자를 보고 "뭔가 잘못됐다"고 의심한 것도 사람이었고, 6단계 흐름도를 그려서 병목을 찾아낸 것도 사람이었습니다.
사업계획서를 쓴다는 건, 결국 세 가지를 증명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진짜인지, 돈이 되는지, 내가 풀 수 있는지. AI는 그 증명에 필요한 재료를 빠르게 모아줬습니다. 하지만 그 재료들을 조합해서 설득력 있는 한 장으로 만드는 일은, 그 사업을 가장 잘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빈칸을 채우는 건 AI가 아니라, 그 사업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